'덕혜옹주' 영화 줄거리
고종에게는 59세에 얻은 늦둥이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덕수궁의 꽃이라 불린 덕혜옹주 입니다.
아들 영친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낸 고종은 딸을 일본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의 결혼을 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아버지 고종이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옹주의 삶도 역사의 격랑 속에 휩쓸립니다.
13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내쫓기게 됩니다.
일제의 횡포가 날로 거세지며 유학을 핑계로 옹주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궁을 떠나게 됩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국을 떠나는 그 순간, 옹주의 험난한 운명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덕혜옹주는 도쿄에 있는 영친왕의 집에 머무르며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합니다.
덕헤옹주는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유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한택수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덕혜옹주의 귀국을 늦춥니다.
시간이 흘러 매일을 시름에 젖어 있는 옹주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한때 옹주와 혼담이 오갔던 김장한입니다.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하던 중, 조카 이우 왕자가 찾아오며 고단하게만 느껴졌던 옹주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우 왕자가 옹주를 이끈 조선인 유학생 모임에서 미처 몰랐던 조선의 동포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닳았습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던 만큼 일반 백성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공주를 반기는 모습은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실제 덕혜 옹주가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에 나섰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과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한택수는 덕혜옹주에게 다이토 중공업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친일 연설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연설을 하는 조건으로 조선으로 보내준다는 약속을 합니다.
덕혜옹주는 일본어로 조선인들 앞에서 연설 합니다.
연설장에서 조선인들의 가혹한 현실을 보게된 공주는 일본어로 연설을 하던 중 한국어로 조선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공주는 "힘드십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라고 연설을 합니다.
이 연설의 감동한 조선인들은 자신의 원래 나라로 돌려보내달라며 거센 항의로 연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립니다.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로 연설을 햇던 사건으로 덕혜옹주는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덕혜옹주는 조국을 아버지, 그리고 친구 같던 복순이, 마침내 어머니까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영친왕과 함께 상하이로 몰래 도망치는 것을 결정하게 됩니다.
김봉국이 일본 고위 인사들이 모이는 기원절 행사에서 폭탄을 터트려 아수라장을 만든다음, 영친왕과 장한이 탈출하고, 덕혜와 이방자가 합류해 상하이로 떠나는 계획을 세웁니다.
작전대로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망명작전이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영친왕이 망명을 거부하면서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작전 실패 후 덕혜옹주는 일본인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며 아이를 낳고 일본에서 결혼생활을 이어갑니다.
1945년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딸과 함께 시모노세키항으로 가게됩니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조선의 입국거부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덕혜옹주는 정신이상으로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1961년 장한은 덕헤옹주가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조치를 합니다. 그 후 덕혜옹주가 있는 정신병원을 찾아내 퇴원수속을 밟고, 조선으로 돌아 옵니다.
긴 시간동안 조선을 그리워한 덕혜옹주는 마침네 조선으로 돌아오게됩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든 황실의 궁녀들과 재회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는 자신의 집이 아닌 한국의 관광지가 되어버린 덕수궁을 방문한 덕혜옹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반기는 상상을 합니다.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덕수궁에 앉아 장한과 덕혜옹주는 담소를 나누며 영화가 마무리 됩니다.